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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종일 기생충썰] 기생충 세계도 '암컷 천하' ... 수컷의 슬픈 역할

관리자 2026.07.09 조회 35

https://www.bosik.kr/news/articleView.html?idxno=27338


[최보식의언론=채종일 메디피스 이사장(서울대 의대 명예교수)]

출처 : 최보식의언론(https://www.bosik.kr)


유치원에 다니는 5살 딸아이가 항문 쪽을 자주 긁는 것을 본 엄마는 매우 놀랐다. 아이는 거기가 무척 가렵다고 했고 툭하면 손이 항문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아이의 항문 주변을 살펴본 엄마는 하얀 실 같은 작은 벌레 2마리가 꼬물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곧바로 소아병원을 방문했다. 의사는 아이가 요충(蟯蟲; Enterobius vermicularis)에 감염되어 있다고 진단하면서 구충제를 처방해 주었다.

필자도 역학조사를 시행하다가 요충에 감염된 경험이 있다. 젊은 시절 의정부 시내 한 초등학교에서 요충 감염에 대한 역학조사를 시행한 적이 있었다. 감염된 학생 약 100명에게 구충제를 투여한 후 2~3일까지 배출되는 분변을 걷어 요충을 골라내었다. 

이 조사를 통해 요충의 암컷 4,000~5,000마리를 수집하였고, 요충 수컷도 400-500마리를 수집할 수 있었다. 수컷은 암컷에 비해 현저히 크기가 작고 왜소해 현미경 하에서 골라내기도 쉽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에서 나온 요충 암컷 3,000마리와 수컷 300마리의 길이와 폭을 재어 평균치와 최대, 최소치를 구해보려고(의학 교과서에 오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판단하에) 밤낮으로 1~2개월을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요충은 지구상의 사람 사는 곳에는 다 있을 정도로 널리 분포한다. 2025년 발표된 한 논문에 따르면 세계 인구 중 4억 명 이상이 요충에 감염되어 있다. 위생 상태가 열악한 환경의 유아, 소아에서부터 문명이 극단적으로 발달한 미국, 영국 등 OECD 국가의 어린이들에 이르기까지 요충의 집단 감염이 빈발하고 있다. 2021년 우리나라도 한국건강관리협회의 보고에 의하면 최근 12년 동안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와 소도시 몇 곳의 소아 연령군에서 평균 0.6-2.0%의 요충 양성율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요충의 암컷은 실 같이 가느다란 모양으로 길이 8-13mm, 폭 0.3-0.6mm이고, 머리는 약간 가늘고 뭉툭하게, 꼬리 쪽은 날카로운 침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pinworm이라 부르기도 한다. 대장(주로 맹장) 점막이나 항문 주위 피부에 이 침을 꽂고 쉽게 달라붙을 수 있다. 수컷은 실같이 가느다란 모양으로 길이 2-5mm, 폭 0.1-0.2mm이고 충체 말단(꼬리 부위)이 약간 말려 올라가 작은 낚시-바늘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끝에는 교미침(spicule)이 나와 있다. 

사람의 입을 통해 들어온 요충 충란(이미 유충이 들어 있음)은 위(胃)와 소장을 거쳐 대장으로 내려와 기생하고 영양분을 섭취하면서 성장/성숙한다. 성숙한 암컷과 수컷은 대장에서 교미하며 암컷은 수컷의 정자를 받아들여 수정란을 만든다. 

그러나 수정란을 가진 암컷은 충란을 자궁 안에 계속 모으고 보관만 할 뿐 장내로 내보내지는 않는다. 이 점은 무척 신기한 현상의 하나다. 대부분의 다른 선충류(회충, 구충, 편충 등)는 장내에서 충란을 산출하여 계속 분변 속으로 내보내는데 이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요충이 산출하는 충란 수가 회충의 ‘하루 20만 개’에 비해 ‘평생 한 번 1만 3,000개’로 월등히 적고, 이에 따라 오랜 진화과정을 거치는 동안 충란을 분변 속으로 내보내는 것보다는 항문 주위에 집중적으로 뿌려주는 것이 자신들의 종족 보존에 훨씬 유리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충란을 계속 모아오던 암컷은 감염 후 약 3개월이 지나면 자궁 내에 충란이 가득 차게 되어 몸이 뚱뚱해지고 둔해져 대장 점막에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는 상태가 된다. 이렇게 되면 요충은 산란을 위해 항문 밖으로 슬슬 기어 나오게 되고 항문 주위 피부에 붙어 꼬물거리며 몇 시간 동안 산란을 하게 된다. 이 꼬물거림 때문에 감염된 아이는 항문 주위에 심한 가려움증을 느끼게 된다. 

산란을 다 마친 요충은 곧바로 죽는다. 하지만 요충 암컷 한 마리가 항문 주위에 1만3,000개의 충란을 배출하므로 어린아이가 손가락으로 항문을 긁고 가령 충란 100개를 묻혀 이를 입으로 가져가게 된다면 100마리의 요충이 이 아이에게 다시 재감염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 손가락으로 다른 아이들과 접촉하거나 문고리, 손잡이, 장난감 등을 만지게 되면 이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요충을 전파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항문 주위에 붙어 있던 충란 덩어리는 옷 먼지 등을 통해 털어져 나와 주변 환경을 오염시키게 된다. 요충은 이렇게 재감염의 강도가 매우 강하고 재감염 속도도 매우 빨라 한 번 유행이 시작된 집단에서는 1년 내내 또는 여러 해 동안 요충 감염의 악순환에 시달리게 된다. 

감염된 아이들은 항문의 심한 가려움증 때문에 매사에 민감한 성격이 되고 신경질적이 되는 등 많은 문제를 유발하며 집중력이 흐려져 학교 성적이 떨어진다는 연구 보고가 나온 적도 있다. 심하게 감염된 여자아이 중에는 항문으로 기어 나온 요충이 생식기 쪽으로 이동하여 산란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 질염 등을 호소하기도 한다. 야뇨증, 자는 도중 깜짝깜짝 놀라는 경기(驚氣) 증상을 호소하는 어린이도 있고 충수돌기염(일명 맹장염)의 원인이 된 경우도 보고되었다.

이렇게 사람에게 다양한 피해를 주고 제법 화려한(?) 일생을 사는(기생충의 입장에서 볼 때) 요충 암컷에 비해 요충 수컷은 사람에게 별로 피해를 주지 않고 조용히 일생을 마치는 편이다. 암컷에게 정자를 제공하여 종족 보존에 도움을 주는 기능 외에 별다른 역할이 없기 때문이다. 

정자 제공을 마친 수컷은 저절로 체외로 배출되어 죽는다. 가련한 요충 수컷의 운명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임상에서 환자로부터 요충 수컷을 관찰하거나 수집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항문주위도말 검사에서 간혹 산란 중인 요충 암컷이 잡혀 나와 관찰되는 경우가 있으나 수컷은 대장 내에만 있고 빠른 시간에 몸 밖으로 쫓겨 나가므로 사람 눈에 띄기가 극히 어렵다. 

최근 인간 사회에서도 여성들의 역할이 점점 더 강해지고 중요해지고 있는 반면, 남성들의 역할은 별로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기생충(암수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경우, 예를 들어 선충류)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한 경향을 볼 수 있다. 암컷이 대체로 수컷보다 몸체가 크고 화려하게 생겼으며 종족 보존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반면, 수컷은 정자 생산 이외에 특별한 역할이 없는 경우가 많다. 요충은 이런 예 중에서도 특히 극단적인 경우다.